솔직히 처음엔 "대게가 그게 그거겠지" 싶었습니다. 비싼 돈 내고 게 한 마리 먹으러 포항까지 내려가는 게 맞는 건지, 출발 전날 밤까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강구항 식당에서 찜기를 열고 다리 살을 처음 빼 먹는 순간, 그 의심은 깔끔하게 사라졌습니다. 이 글은 그날 이후 두 번 더 다녀온 경북 동해안 여행 이야기입니다.
강구항에서 처음 먹은 영덕 대게

찜기 속 대게를 받아 들고 다리 살을 쭉 빼 먹는 순간, 제가 그동안 먹어온 냉동 대게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바로 알았습니다. 결이 살아있는 하얀 살에서 단내가 올라오고, 씹을수록 바다 향이 퍼지는 그 맛. 그날 2인이서 두 마리를 다 비웠고, 집에 돌아오는 KTX 안에서 이미 다음 방문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영덕 대게는 금어기(禁漁期)가 있습니다. 금어기란 특정 어종의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포획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영덕 대게의 경우 매년 6월부터 10월까지 조업이 금지되므로, 이 시기에는 국내산 생물 대게를 맛볼 수 없습니다. 제철은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이며, 그중에서도 살이 가장 꽉 차는 2~4월이 최고 성수기입니다(출처: 영덕군청).
강구항에서 대게를 먹을 때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산지 표시입니다. 영덕 대게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산이나 북한산을 섞어 파는 식당이 일부 있습니다. 제가 직접 발품을 팔아보니 수협 직판장에서 살아있는 대게를 직접 고른 뒤 바로 옆 식당에 가져가 쪄 먹는 방식이 가장 신뢰할 수 있고, 가격도 합리적이었습니다. 수협 직판이란 수산업협동조합이 직접 운영하는 판매 창구로, 유통 단계가 줄어 가격이 낮고 원산지 관리가 투명한 것이 특징입니다.
대게 한 마리 가격은 크기에 따라 3만 원에서 많게는 10만 원 이상까지 올라갑니다. 비싸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항구에서 바로 쪄 먹는 제철 생물 대게의 경험은 서울에서는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게장 한 상과 함께 주문하면 훨씬 푸짐한 한상차림이 됩니다.
블루로드 트레킹, 전 코스 완주에 집착하지 마세요
다음날 아침 블루로드 B코스 일부를 걸었습니다. 해파랑공원에서 바다를 옆에 두고 걷는 2킬로미터, 파도 소리와 바다 내음만 있는 그 길이 얼마나 고요하고 좋던지요. 제가 걸어보고 느낀 건, 전 코스 완주에 집착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영덕 블루로드는 총 64.6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 트레킹 코스입니다. 4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코스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A코스(빛과 바람의 길): 17.5km, 강구항 출발, 풍력발전단지 경유. 체력 소모가 크고 오르막 구간 포함.
- B코스(쪽빛 파도의 길): 14.6km, 영덕 해파랑공원~고래불해수욕장. 경사가 완만하고 해안을 따라 평탄하게 이어져 중장년에게 가장 적합.
- C코스(대게의 길): 18.2km, 강구항~차유마을. 해안 절벽 조망이 압도적이나 난이도가 높은 편.
- D코스: 고래불해수욕장~대진해수욕장 구간으로 비교적 짧고 완만.
여기서 해파랑길이란 동해안 전체를 남에서 북으로 연결하는 장거리 트레킹 루트를 뜻합니다. 영덕 블루로드는 이 해파랑길의 일부 구간과 겹치기 때문에, 이미 해파랑길을 걸어본 분들에게도 새로운 맛이 있습니다. 블루로드 전 구간 지도는 영덕군청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고, 각 코스 시작점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원하는 구간만 걷고 차로 복귀하기 편리합니다.
제 경험상, 3~5킬로미터 구간만 골라 걷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신발은 B코스 단거리 구간은 운동화로도 가능하지만, A코스와 C코스에는 비포장 오르막 구간이 있어 트레킹화를 신지 않으면 발이 고생합니다.
영덕 풍력발전단지, 예상 밖의 풍경
블루로드 트레킹 후 들른 영덕 풍력발전단지는 솔직히 기대를 안 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풍력발전기들이 동해 바다를 배경으로 느릿느릿 돌아가는 풍경이 생각지도 못하게 아름다웠습니다. 포항·영덕을 먹방 여행지로만 알고 갔다가 풍경 여행지로도 충분하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영덕 풍력발전단지에는 총 24기의 풍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풍력발전기란 바람의 운동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변환하는 발전 설비로, 이곳 영덕 단지는 해발 150~250미터의 능선 위에 조성되어 동해 전망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실제로 능선에 올라서면 왼쪽으로는 동해 쪽빛 바다가, 오른쪽으로는 내륙 산지가 펼쳐져, 어느 방향을 봐도 그림이 됩니다.
드라이브 코스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강구항에서 차로 20분 남짓이면 올라갈 수 있고, 일몰 시간에 맞춰 가면 풍력발전기 실루엣이 노을에 물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일출은 호미곶, 일몰은 영덕 풍력단지라는 공식을 만들어도 좋을 만큼, 두 장소의 성격이 뚜렷하게 다릅니다.
한국에너지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국내 풍력발전 설비 용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영덕 단지는 초기 해상·육상 풍력 보급의 상징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힙니다(출처: 한국에너지공단).
포항 호미곶과 죽도시장, 이렇게 묶어야 효율적입니다
KTX 포항역에 내려 렌터카를 빌리면, 포항 남쪽(호미곶·구룡포)을 먼저 보고 북쪽 영덕으로 이동하는 순서가 가장 효율적입니다. 7번 국도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달리면 드라이브 자체가 여행의 일부가 됩니다.
호미곶은 한반도 육지에서 동쪽으로 가장 많이 돌출된 지점입니다. 이를 지리학 용어로 육계사주(陸繫沙洲)와는 구분되는 돌출곶(headland)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땅끝을 가리킵니다. 이 지형 덕분에 일출 시각이 내륙보다 이르고, 수평선과의 각도가 정면으로 맞아 일출 감상에 최적의 조건이 만들어집니다.
겨울 방문이라면 구룡포 근대역사거리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가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리에서 과메기 건조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과메기란 청어나 꽁치를 동해의 차고 건조한 바닷바람에 반건조시킨 포항 특산 수산 가공품으로, 쪽파와 미역에 싸서 먹는 방식이 현지 스타일입니다. 처음엔 비린내가 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막걸리 한 잔과 같이 먹으면 또 다른 맛이 납니다.
포항 죽도시장은 영남권 최대 수산시장으로, 활어와 건어물을 서울 대비 절반 이하 가격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귀갓길에 들러 과메기와 건미역을 한 보따리 사 왔는데, 이게 나중에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항·영덕 여행은 '먹고 걷고 보는' 세 가지가 균형 있게 갖춰진 코스입니다. 대게 한 마리와 블루로드 2킬로미터, 풍력단지 드라이브까지 묶어도 1박 2일이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습니다. 렌터카 없이는 이동이 상당히 불편하다는 점만 미리 감안해두면, 나머지는 현지에서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대게 제철인 11월부터 5월 사이에 계획을 잡는다면, 이 여행은 기대 이상으로 돌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