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삼한시대에 축조된 저수지가 지금도 멀쩡히 물을 담고 있다면 믿어지십니까. 의림지가 바로 그 곳입니다.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10월 중순 이른 아침 그 제방 위에 서는 순간 괜히 발바닥이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제천은 그런 도시입니다. 자연과 역사가 겹쳐 있어서, 드라이브 한 번에 생각보다 많은 걸 얻어 오게 되는 곳.
의림지 2,000년 저수지에서 시작하는 아침
의림지의 정식 면적은 6.2ha입니다. 숫자만 보면 작게 느껴지지만, 제방 산책로를 한 바퀴 걷다 보면 수면이 생각보다 넓고 잔잔하다는 걸 체감하게 됩니다. 제가 방문한 10월 중순 아침 7시 무렵에는 수면 위로 안개가 얕게 깔려 있었습니다. 영호정과 경호루, 두 개의 정자가 안개 속에 살짝 잠긴 풍경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호수를 찾은 사람이 저 말고는 거의 없었고, 덕분에 꽤 긴 시간 혼자 그 풍경을 독점했습니다.
의림지는 국내 고수리 저수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관개시설(灌漑施設)로 분류됩니다. 관개시설이란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논밭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수리 구조물을 말합니다. 삼한시대 축조 추정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고, 현재도 인근 농업용수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 단순한 관광지와 다른 결을 만들어 냅니다. 문화재청은 의림지를 국가 명승 제20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출처: 문화재청).
봄에는 제방을 따라 벚꽃이 피고, 가을에는 은행나무와 단풍이 물듭니다. 저는 가을에 방문했는데, 제방 길 위에 노란 잎들이 얇게 쌓여 있었습니다.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또 이상하게 기분 좋은 소리였습니다. 의림지에서 청풍 방향으로 출발하기 전, 이 산책을 빠뜨리지 마시길 권합니다. 출발점으로서 이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
청풍호 드라이브, 왜 '인생 드라이브'라고 부르는지
청풍호는 1985년 충주댐 완공으로 형성된 인공 호수입니다. 면적 67.5㎢, 최대 수심 97.5m에 달하는 거대한 수계(水系)로, 수계란 강·호수·저수지 등 물이 모이는 지형적 단위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댐을 막아 만든 호수가 아니라, 주변 산지와 어우러져 독립적인 경관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청풍호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청풍대교를 넘는 순간 오른편으로 청풍호가 열립니다. 제가 직접 그 구간을 달려봤는데, 차를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풍이 물든 산들이 호수 수면에 그대로 반영(反影)되어 있었거든요. 반영이란 물체가 수면에 대칭으로 비쳐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맑은 날씨와 잔잔한 수면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만 볼 수 있는 장면인데, 그날은 운 좋게 두 조건이 다 충족됐습니다. 조수석에 있던 일행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이 필요 없는 풍경이라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청풍호 드라이브 코스를 효율적으로 즐기려면 다음 순서를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 청풍대교 진입 후 갓길 쉼터에서 호수 전경 감상
- 청풍문화재단지 주차장에서 내려 수몰 문화재 관람 (1시간 내외)
- 비봉산 모노레일 탑승 후 정상 전망대에서 파노라마 조망
- 청풍나루 유람선 (선택, 약 40분 코스)
제천시 문화관광 안내에 따르면 청풍호 드라이브 코스는 봄 벚꽃, 가을 단풍 시즌 모두 국내 최상급 드라이브 경관으로 꼽힙니다(출처: 제천시 문화관광). 저도 여러 국내 드라이브 코스를 다녀봤는데, 청풍호처럼 산·호수·도로가 이 정도 밀도로 맞물린 구간은 흔치 않다고 봅니다.

비봉산 전망대와 한방닭백숙, 그 이후
비봉산 정상까지는 모노레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모노레일이란 단일 레일 위를 주행하는 궤도 차량으로, 가파른 경사를 체력 소모 없이 오를 수 있어 시니어 여행객에게 특히 적합합니다. 무릎이나 허리가 불편하신 분도 왕복 탑승만으로 정상 전망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케이블카를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이건 탑승이 꽤 즐거웠습니다. 올라가는 내내 창밖으로 청풍호가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는 과정 자체가 볼만합니다.
정상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청풍호는 도로 옆에서 본 것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호수의 윤곽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에 이런 규모의 풍경이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단풍이 산 전체를 덮고 있는 시즌이라면 그 압도감은 배가 됩니다.
점심은 제천 한방닭백숙을 먹었습니다. 제천 지역은 황기·당귀 등 한약재 주산지로 알려져 있어, 이를 활용한 한방 보양식이 향토 음식으로 자리 잡아 있습니다. 황기(黃芪)란 콩과 식물에서 채취한 한약재로, 면역력 증강과 기력 회복에 활용되는 전통 약재입니다. 백숙 국물이 한약 냄새 없이 진하고 깊었는데, 오전 내내 걷고 드라이브한 몸이 국물 한 그릇에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가 졸았는데, 그 졸음이 참 좋은 종류의 피로였습니다.
한 가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천 시내 자체는 여행지로서 다소 아쉬운 편입니다. 청풍 일대를 벗어나면 볼거리가 줄어들고, 식당도 분산되어 있어 방문 전 미리 검색해 두는 편이 낫습니다. 또한 주말 비봉산 모노레일은 대기가 길 수 있으니 오전 중에 먼저 올라가는 것을 권장합니다.
제천 청풍호는 기대보다 훨씬 많이 돌아오게 만드는 여행지입니다. 가을 단풍 절정기를 노린다면 10월 중순~11월 초, 가능하면 평일 방문을 강하게 권합니다. 주말과 평일의 혼잡도 차이가 상당합니다. 당일치기로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지만, 청풍호 일몰까지 보고 싶다면 인근 펜션에서 1박을 더하는 것이 훨씬 남는 여행이 됩니다.